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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05호) ㅣ 국정 해법 실마리, 세종에게 물으면

작성자최고관리자

  • 등록일 24-04-11
  • 조회88회
  • 이름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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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해법 실마리, 세종에게 물으면


박현모(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자연재해는 위정자 꾸짖는 하늘의 경고인가?


이번 주 세종실록 강독을 위해 <국역 세종실록> 17권을 되읽었다. 재위 26년째인 1444년 7월부터 1446년 6월까지이다. 470여 쪽에 이르는 이 책을 펴면 먼저 만나게 되는 기사가 ‘연생전 벼락사건’이다. 경복궁 강녕전의 옆 건물인 연생전을 지나던 궁녀가 벼락을 맞아 즉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세종은 먼저 ‘두렵다’고 했다. “하늘이 벼락을 떨어뜨려 꾸짖는 뜻을 보이니 나는 매우 두렵다[予甚懼焉 · 여심구언]”면서 하늘의 꾸짖음[天譴 · 천견]에 반응하는 차원에서 사면령 등 ‘백성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悅民之事·열민지사]’을 찾아보라고 지시하였다(세종실록 26년 7월 10일). 



신하들은 ‘천둥과 벼락은 양기(陽氣)가 서로 부딪쳐 생기는 것으로, 사람의 잘잘못과 무관하니 자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벼락사건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인 왕과 달리 신하들은 과학적으로 해석했다. “천둥 벼락의 변(變)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고 하늘의 꾸짖음은 아니라”는 도승지 이승손의 말이 그랬다. 결국 세종은 백성을 기쁘게 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다음 날(11일) 감옥의 억울한 사람을 찾아 풀어주라는 사면령을 내렸고, 궁녀 45명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12일). 왕이 타는 말의 수를 줄여 삼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4일).



‘두렵다[懼 · 구]’는 말과 함께 눈에 띄는 말은 ‘부끄럽다[愧 · 괴]’이다. “지금 도적이 많다 하는데, 이는 내가 백성의 살림살이를 마련해 주지 못해서, 그들이 살 곳을 잃은 때문”이라면서 세종은 “나는 매우 부끄럽다[予甚愧焉]”고 말했다(세종실록 26년 10월 9일). 귀화한 여진족이 우리나라를 탈출해서 돌아갔다는 보고를 듣고는 “지난날의 일을 깊이 생각하여 보면 참으로 부끄럽다”면서 귀화인들을 더욱 살뜰히 보살피고, 지나치게 제어하지 말아서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하게 하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27년 10월 27일).



표심을 두려워하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위정자들

유독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세종의 말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아마도 오늘이 투표일이기 때문인듯도 하다. 유권자의 표심을 두려워하되 자신들의 언행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치가들이 대부분이다. 사과와 대파 등 농산물 가격이 치솟는 이유는 유통과정의 문제점 때문이며 나라에서 특별히 잘못한 건 없다는 게 정부와 여당의 태도이다. 야당 대표는 법정에 출두하면서 ‘정치검찰의 공작수사 때문’이며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강변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건 “대파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이다. 민주당 등 야권은 이 발언을 경제적 무능과 실정을 들추는 소재로 삼고 있지만, 사실 우리 경제는 1997년 이후 계속해서 침체기를 겪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고물가는 정권을 초월해서 서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지난 정부는 “파 파괴 정부”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대파 발언에 대해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무얼까?


‘한 해도 흉년 아닌 해가 없구나’는 세종의 개탄처럼, 세종 때도 민생경제는 늘 어려웠다. 재위 18년째인 1436년(병진년)부터 그다음 해까지 이어진 ‘병진대가뭄’이 제일 큰 고비였다. “올해 가뭄이 심하여 밀·보리가 반드시 말랐다”다는 보고에 이어 “우물과 냇물이 모두 말랐으며 밀과 보리가 다 말랐으니 매우 걱정”이라고 현지 보고가 전달되었다(세종실록 18년 4월 25일). 2년 연속 가뭄이 이어지자 사태가 매우 심각해져서 1437년 기록을 보면 부모가 어린아이를 나무에 매어놓고 고향을 떠나가야 했으며, 전염병이 치성해서 죽는 사람도 많았다(세종실록 19년 1월 14일 ; 19년 2월 4일). 


중차대한 민생위기 때 세종이 취한 조치


이처럼 중대한 민생위기 상황에서 세종은 어떤 조치를 취했나? 그는 우선 <농사직설>을 전국에 반포해 개량된 볍씨를 파종하고, 가을갈이 등 선진 농법을 시험하게 하는가 하면, 구황에 유리한 무 재배를 권장하게도 했다(과학영농). 다음으로, “우리나라는 동쪽에 큰 산이 있어서 동풍이 불면 산 서쪽의 곡식이 충실해지지 못하고, 서풍이 불면 산 동쪽의 곡식이 충실해지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에 의거해 보다 여유 있는 지역의 곡식을 긴급히 이동시켜 구휼에 도움되도록 했다(유통). 무엇보다 세종은 지방 수령들에게 자기 지역 주민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식량을 주어 사람 살리기에 전념하라고 지시했다(생명구호 최우선).



이번에 세종실록을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점이 있다. 국가의 신속한 조치와 관리들의 헌신도 놀랍지만, 그에 앞서 세종이 보인 태도이다. 세종은 “왕위에 있은 지가 20년인데 조금도 다스린 공효가 없고, 해마다 계속하여 홍수를 만나 기근이 끊이지 않고, 이웃 도적이 자주 변경을 소요(騷擾)하게 한다”면서 비록 백 가지 정책을 시행해 보지만 늘 뉘우침만 있으니 “실로 깊이 공경하고 두려워하게 된다”면서 부끄러워했다(세종실록 19년 3월 27일). “근년 이래로 나랏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그 이유를 캐보면 “실로 과인의 몸에 있다”고 반성하기도 했다(세종실록 19년 4월 1일).



왕은 이처럼 나라 어려움을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난관을 타개할 제안을 들려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求言 ·구언]. 거기서 더 나아가 자기 가족들의 재산을 적지 않게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수많은 정책 제안이 어전회의에 쏟아져 들어왔다. “수령들은 담당자를 몸소 이끌고 마음을 다하여 조치하고 친히 백성을 구휼”했는데, 그로 인해 “백성들이 힘입어서 살아난 자가 많았다.”(세종실록 19년 2월 9일). 국가 재정에 도움 되도록 가족 재산을 헌납한 왕의 조치에 호응하여 신하들 역시 자신들의 급여를 줄였다. 그 결과 “부황(浮黃: 오래 굶주려서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 들어 죽게 된 사람들 많이 살아났으며, 구휼을 받으러 온 백성이 날로 기운이 씩씩해져서 현지 주민[居民]보다 오히려 더 건강해진 경우까지 있었다”는 게 실록의 기록이다(세종실록 19년 2월 4일).


법조인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국정 해법 실마리 찾을 수 있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 정치에서 세종 같은 지도자는 다시 볼 수 없는 것일까? 여야가 힘을 모아 한국경제를 장기침체기에서 벗어나게 할 방략을 그려내고, 차세대 인재를 키워내는 데 집중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 출발점이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국가 지도자의 태도에 있다고 본다. 법정에서 변론하듯이, 우리가 옳고 저쪽은 그르다고 주장하는 법조인 마인드에서는 해법이 안 나온다. 연속되는 가뭄으로 온 나라의 시냇물이 말라 농산물 가격이 폭등함도 내 책임이고, 백성이 벼락 맞아 죽은 일도 하늘이 주는 경고라고 받아들이며 자세를 낮출 때, 비로소 국민들은 마음을 열고 대통령의 국정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병진대기근’이 한창이던 1437년(재위 19년) 8월 6일 세종이 김종서에게 쓴 편지에 그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내 몸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이익 주는 정책이 들리지 아니하고 번요(煩擾)의 일만이 날로 많아지니, 

나는 너무도 부끄럽고, 심히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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