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나본 CEO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쪽은 “ESG는 하나의 유행처럼 지나갈 것”이라고 보는 분들이고, 다른 한쪽은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적극 대응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후자의 경우, 세종의 ‘삼선(三先) 경영’, 곧 사안의 본질을 먼저 내다보고(先見), 선제적으로 결정하며(先決), 한발 앞서 실행하는(先行) 리더십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분들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분들의 요청으로, 나는 기업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세종에게 배우는 ESG 경영 해법」을 여러 차례 강의하기도 했다.
내가 ESG 경영에 관심을 갖고 강연까지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22년 국회사무처 과제로 수행한 《ESG 관점에서 본 세종리더십》 연구가 있다. 세종 시대 사람들은 환경과 사회적 공헌, 그리고 투명경영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해, 실록을 1년 가까이 탐독한 끝에 가까스로 논문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했다. 첫째, 환경(E)·사회(S)·지배구조(G)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둘째, 통합적 접근이란 가장 중요한데 가장 미진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진척시키는 것을 뜻한다. 셋째, 세종은 ESG 경영 가운데 가장 어렵고도 핵심적인 과제인 지배구조의 투명화(G)를 솔선수범하여 실천했다. 넷째, 바로 그 점이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E)을 경외하고 사회적 책임(S)을 다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 논문의 요지다.
논문을 바탕으로 몇 차례 긴 칼럼을 썼는데, 예상 밖의 호응이 여러 곳에서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자연환경 관련 법규가 그렇게 엄격했는지 몰랐다”는 반응부터, 《훈민정음 해례본》에 담긴 ‘하늘과 땅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본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또 강원도 관찰사 황희가 보여준 ‘수요자(백성) 중심의 구휼(救恤) 행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는 회신을 보내주신 분도 있었다. 세종 시대의 국정 운영이 오늘의 ESG 논의와 이렇게 깊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새롭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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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세종이 ESG 가운데 가장 어렵고도 핵심적인 영역인 지배구조(G)의 투명화를 제도적으로 실천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어전회의의 활성화’와 ‘실록 체제의 수립’이다. 오늘의 기업 경영에 비유하자면, 세종은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이사회를 실효성 있게 운영하는 한편, 회의 내용과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기록·보존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셈이다. 그 중심에는 기록 시스템이 있었다. 1434년 11월 5일, 역사 기록을 담당하던 춘추관은 왕명을 받아 세 가지 중요한 규정을 마련했다(세종실록 16년 11월 5일).
첫째는 기록 담당자의 대폭 확대이다. 어전회의에 배석하는 사관뿐 아니라, 사헌부처럼 법과 풍속을 담당하는 관리들, 승지와 사간원 관리들까지 기록에 참여하게 했다. 외교 업무를 위해 외국에 파견된 사신들 역시 사관의 역할을 맡아 보고를 남겨야 했다. 궁중 내부의 은밀한 일들은 태종 때부터 여사(女史)라 불린 여성 사관들이 기록하고 있었다. 기록의 범위와 주체를 넓힘으로써, 국정 운영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려 한 것이다.
둘째는 기록의 독립성과 객관성 확보이다. 역사 기록을 맡은 춘추관의 사관직에는 뛰어난 인재를 엄선해 배치하고, 기록 대상 인물의 능력과 품성[賢否, 현부], 일의 득실(得失), 나아가 비밀스러운 내용까지도 소상히 기록·평가하여 개인적으로 보관하게 했다. 이른바 가장 사초(家藏史草)의 제도화이다(세종실록 16년 11월 5일).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이 더해졌다. 하나는 가장 사초를 국가가 회수하는 시점이다. 사초를 사관의 집에 보관하게 하다가, 그 기록의 대상이 된 국왕이 훙서한 뒤에야 비로소 국가가 수납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재위 중인 국왕이나 주변 권력이 사초를 미리 열람하거나 수정 압력을 가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기록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지키고자 했다.
다른 하나는 사관의 강한 소명 의식과 엄정한 기록 보존 원칙이다. 당시 사관들은 “하늘이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명감 아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보존하고자 했다. 기록의 원본성을 훼손하거나 내용을 누설한 자에 대해서는 극히 엄격한 처벌 규정을 두어, 몇 글자만 삭제하거나 훼손해도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1년 3월 2일).
셋째는 체계적인 관리와 보관이다. 예문관 관리는 춘추관에 출근하여 각 관청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문서를 점검하고, 이를 연월 순으로 편찬하여 곧바로 찬록(撰錄)했다. 기록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춘추관 당상관이 매월 한 차례 문서 관리를 점검하도록 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나아가 정기적으로 실록을 포쇄(曝曬), 곧 햇볕과 바람에 말려 습기를 제거하고, 안전한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돌이켜보면, 세종이 세운 이 기록 체제는 단순한 역사 편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정 운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제도화한 장치였으며, 오늘날 기업 경영에서 말하는 지배구조의 핵심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
세종 시대 사람들의 자연관을 이야기할 때는 다소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 사상가들이 전제한 ‘근대적 인간’의 한계를 짚고, 전통시대 사람들의 자연관에서 오늘 우리가 배울 점을 학술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긴 논의를 한마디로 줄이면 이렇다. 초뷰카(hyper VUCA) 시대, 곧 유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이 확대 재생산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윤정구, 《초뷰카 시대의 지속가능성의 실험》, 2022), 근대적 인간관의 한계가 점차 분명해지고 있으며, 이제는 세종 시대 사람들이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을 비롯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연을 개발과 개척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낳고 기른 부모이자 본성을 함께하는 벗으로 인식했다. 우주의 본성은 그 일부인 인간의 본성과 서로 통한다고 보았다. 하늘과 땅은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움직이며, 그 사이에 있는 사람 역시 이 질서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하늘이 낸 자연을 함부로 소진하는 행위, 곧 포진천물(暴殄天物)은 재앙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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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종이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았다고 해서, 환경 보전을 위한 인간의 역할까지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은 삼라만상을 연결하고 보살피는 책임적 존재였다. 이 점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천지인(天地人) 사유에서 잘 드러난다. 훈민정음은 천·지·인의 삼재(三才)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데, 그 가운데 사람의 역할이 특별히 강조된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이루어도 쓸모 있게 하고 서로 돕게 하는 것은 반드시 사람을 기다려 이루어진다[待人而成 대인이성]”는 대목이 그렇다. 곧 초·중·종성 가운데 사람에 해당하는 중성(中聲)이 있어야 비로소 온전한 글자가 이루어지듯, 인간과 자연의 상생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책임 있는 역할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자연환경 보호는 크게 두 측면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소극적, 곧 규제적 측면에서 보면 당시 환경 관련 법규는 매우 엄격했다. 허가 없이 산림을 벌목한 자에게는 장(杖) 90대를 가했고, 이를 관리해야 할 산지기[山直]와 고을의 관리에게도 각각 장 80대와 60대를 내렸다(《경국대전》 「공전」 재식(栽植)). 이 규정에 따르면 화재를 일으킨 사람뿐 아니라, 관리 책임을 다하지 못한 공무원과 지방 수령까지도 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도성 주변의 자연환경 관리는 더욱 철저하여, ‘성저(城底) 10리’와 사산(四山) 안에서는 건축이나 매장(埋葬) 등도 한성부의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한편 적극적인 측면도 있었다. 단순히 훼손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나무를 심고 물길을 여는 등 환경을 가꾸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남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고, 경복궁 서쪽에 우물을 파며, 청계천 준천에 힘쓰는 등 거의 모든 국왕이 도성 환경을 가꾸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세종실록 15년 7월 21일; 태종실록 11년 1월 3일, 1월 7일; 세종실록 16년 4월 24일; 29년 8월 10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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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옛 선조들의 자연관과 환경 보전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묻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발견이 오늘날 ESG 실천을 눈앞에 둔 기업과, 재앙에 가까운 자연재해를 겪고 있는 인류에게 어떤 해법을 줄 수 있을까. 물론 포진천물(暴殄天物), 곧 하늘이 낸 만물을 함부로 소진해서는 안 된다는 경구는 지금도 유효한 교훈을 준다(《서경》 「무성」). 또한 환경 관리가 주로 관(官) 주도로 이루어졌던 조선왕조에서, 국가 기강이 느슨해진 세도정치기에 급속한 환경 훼손이 뒤따랐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는 데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넘어, 지속 가능한 지구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길을 여는 새로운 대안이며, 나는 그 실마리를 세종의 자연에 대한 접근 자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연을 외경(畏敬)하되 사람의 일을 다해야 한다”는 태도이다.
세종은 자연을 두려운 마음으로 공경하되,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의 원리를 깊이 탐구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끝까지 도전했다. 우리 농법을 수집하고 직접 실험하여 《농사직설》이라는 첨단 농업서를 편찬·보급한 일이 그 대표적 사례다. 자연 그 자체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두려운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아서는 안 되며,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다해야 한다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세종은 특히 무소불통(無所不通), 곧 자연의 원리를 깨닫기 위해 통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는 자세로 학습에 몰입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훌륭한 지도자들을 보면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無所不通]”고 한다. 그래서 왕 자신도 천문과 지리까지 모르는 것이 없도록 끝까지 파고들어 그 이치를 밝혀내고[天文地理 靡不究致 천문지리 미불구치], 이를 국가 경영에 활용하고자 했다(세종실록 15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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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태종의 헌릉 옆길을 풍수지리 차원에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세종은 이 문제를 단순한 미신이나 관행의 문제로 넘기지 않았다. 그는 경연에서 이 사안을 정식으로 논의하자고 제안했고, 《지리전서(地理全書)》를 바탕으로 어전회의에서 “매일 그 이치를 강론하자[日講其理 일강기리]”고 했다(세종실록 15년 7월 7일). 곧 자연과 공간의 문제조차도 토론과 학습, 검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유교 이외의 사상과 지식에 대해서도 “투철하게 살피고[洞 통]” “그 근원을 끝까지 캐어 본 뒤[究源 구원]”, 나라에 이롭고 국가 경영에 도움이 된다면 실용적인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려 했다(세종실록 15년 7월 7일). 그 결과, 환경을 보전하면서도 사람들의 통행을 보장하는 ‘박석(薄石)고개’라는 제3의 방안이 마련될 수 있었다(문종실록 1년 10월 16일).
그렇다면 오늘 지속 가능한 지구 생태계를 만드는 길을 세종에게 묻는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답할까. 아마도 자연보호를 위해 규제만 늘리는 소극적 접근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지구의 암적 존재로 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극단적 환경근본주의자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세종은 자연의 원리를 더욱 “투철하게” 이해하고, 그 “근원을 끝까지 캐어내어”, 자연을 보존하면서도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해법을 끊임없이 찾아내라고 권할 것이다. 오늘의 ESG 경영이 지향해야 할 길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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