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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28호] 장영실 미스터리와 대한민국 노벨과학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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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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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양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는 장영실의 말년이다. 다른 하나는 정조 시대 ‘나라 안의 으뜸가는 화가[國畵 국화]’ 김홍도의 최후이다. 장영실은 1442년(세종 24) 3월, 이른바 ‘안여(安輿) 절훼 사건’, 즉 임금이 타는 가마가 이동 중 부러지고 무너져[折毁 절훼] 세종이 크게 다칠 뻔한 사건으로 의금부의 조사를 받고 곤장을 맞은 뒤 파직되었다.

안여 절훼 사건, 장영실은 왜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그런데 장영실이 누구인가? 그는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정교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고, ‘조선 최고의 명품 활자’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완성한 당대 으뜸 장인이었다. 부산 동래현의 관노 출신으로서 태종에게 발탁되었고, 세종에게도 높이 평가되어, 남양부사 윤사웅 등과 함께 명나라에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런 그가 임금이 타는 가마 하나를 부실하게 만들어 파직되고,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안여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해석과 추론이 제기되었다. 연구자들은 대체로 이를 “미스터리”라 하거나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고 표현할 뿐, 단정적인 추측은 삼갔다. 반면 소설가나 드라마 작가들은 음모설과 기획설 등 보다 적극적인 상상력을 펼쳤다. 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실책설이다. 가마 제작을 총괄한 장영실이 부주의로 안여를 부실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곤장을 맞고 파직되었다는 해석이다. 남문현 교수(2002)와 전상운 교수(2000)가 대표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한다. 그 근거는 《세종실록》에 실린 의금부의 보고이다. “대호군 장영실이 가마를 감독하여 제조함에[監造安輿 감조안여]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不謹愼牢固 불근신뇌고]” 사고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세종실록 24년 4월 27일). 곧, 왕이 타는 안여가 부러진 것은 기술적 실수였으며, 그 책임을 제작 책임자인 장영실이 그대로 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안여사건을 둘러싼 세 가지 해석: 실책·음모·기획

둘째는 음모설이다. 사대모화주의자들이 훈민정음 반포를 막기 위해 왕의 가마에서 일부 부품을 고의로 빼내 사고를 일으키고, 그 책임을 장영실에게 씌워 장형(杖刑)으로 죽게 하거나 관직에서 밀어내려 했다는 해석이다. 소설가 이정명의 작품(2006)과 KBS 드라마 <장영실>(2016)이 대표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한다. 이 해석의 근거는 안여사건 직전에 연이어 발생한 몇 가지 수상한 사건들이다. 예컨대 세종이 머물렀던 강원도 이천(伊川)의 온정(溫井)에서, 기둥에 바른 새 흙이 갑자기 떨어져 자칫 큰 위험으로 이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세종실록 24년 4월 1일). 이어 온정 욕실에 화재가 발생하는 일도 있었다(세종실록 24년 4월 17일, 25일). 이런 일련의 사건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한글 창제와 천문역법 연구를 통해 조선의 독자적 길을 모색하던 세종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적 시도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왕을 직접 해치거나 정치적으로 흔들어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자주적 정책을 중단시키려 했다는 해석이다.

셋째는 기획설이다. 안여사건 자체가 세종의 의도 아래 만들어졌다는 해석이다. 소설가 김종록(2015)과 오세영(2008), 그리고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가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명나라가 경복궁의 천문대와 관련해 장영실의 압송을 요구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세종이 일부러 안여사건을 계기로 그를 파직시키고 다른 곳으로 물러나게 했다고 본다. 이 해석의 근거는 1443년(세종 24) 말부터 시작된 천문 프로젝트의 갑작스런 변화이다. 세종은 경복궁 경회루 뒤에 세워져 있던 간의대(簡儀臺)를 철거하게 하면서,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중국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세종실록 25년 1월 14일). 오랜 정성과 비용을 들여 만든 천문 관측 시설을 스스로 헐어버린 것이다(세종실록 24년 12월 26일).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세종이 명나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천문 사업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그 핵심 인물이었던 장영실 역시 공식 무대에서 사라지게 했다고 본다. 겉으로는 파직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보호였다는 해석이다. 나아가 그는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필요한 대량 인쇄용 활자 제작과 같은 비공식적 역할을 맡았을 것이라는 상상도 여기서 나온다.

완벽한 군주가 아니라, 흔들리며 버틴 세종

나는 이 세 가지 해석이 각각 일정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본다. 세 주장 모두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사료와 사료 사이의 빈틈을 메우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장영실 개인의 운명보다, 세종이 그와 함께 추진했던 일들이 그만큼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종 시대의 국가사업 가운데 쉽게 추진된 것은 거의 없었다. 훈민정음 창제도, 천문 사업도, 세제 개혁도 모두 거센 반대와 저항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세종은 자주 자괴감을 토로하며 한탄하곤 했다.

세자의 강무(講武)와 대리청정이 반대에 부딪히자 그는 “매우 부끄럽다”고 하며, “내가 즉위하던 처음에는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능히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세종실록 21년 7월 4일). 장영실이 파직된 다음 해인 1443년에도 그는 “사람들 말에 마음은 있으나 힘이 따르지 못한다 하지 않는가. 내 병이 날로 심해져 나라의 큰일을 다스리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탄식했다(세종실록 25년 5월 28일). 조금 뒤인 1446년, 세제 개혁이 거센 반대에 부딪혔을 때는 더욱 깊은 좌절을 드러냈다. “옛 임금들 가운데는 스무 살 무렵이면 사리에 밝고 결단력이 있어 큰 공업을 이룬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나는 도저히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세종실록 28년 6월 18일).

우리가 기억하는 세종은 늘 완벽하고 흔들림 없는 군주이지만, 실록 속의 세종은 오히려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흔들리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보던 사람이었다. 장영실의 말년을 둘러싼 미스터리 역시 바로 그런 점을 감안해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장영실과 세종의 이야기는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미담이기도 하다. 장영실은 지방의 노비로서 한양으로 올라와 천민 신분을 면하고 기술직 관리가 되었고, 자격루 같은 국가적 사업을 완성한 뒤에는 중앙 부서의 고위 관리직 공무원에까지 올랐다. 한마디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출발해 국가의 핵심 사업을 이끈, 조선판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신분의 벽을 넘어 재능을 알아본 군주와, 그 믿음에 자신의 삶으로 응답한 기술자의 만남이 곧 장영실 이야기이다.

실록에서 장영실의 이름이 처음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1425년(세종 7)의 기사다. 세종은 평안감사에게 장영실의 말대로 석등잔을 준비하라고 지시한다(세종실록 7년 5월 8일). 중국 사신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그의 기술로 만들게 한 것이다. 이는 이미 그의 솜씨가 궁중에서 깊은 신뢰를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세종의 사람 쓰는 법

그런데 세종의 신임은 그보다 앞선 1421년(세종 3)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연려실기술》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을 보면 장영실은 세종이 즉위하고 얼마 안 되어(세종 3년) 천문관인 윤사웅 등과 중국에 파견되어 천문관측시설과 과학기술 문물을 시찰하고 서적을 수집해 돌아왔다. “너희는 중국에 가서 각종 천문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라”라는 세종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관노 출신의 인물을 국가의 핵심 기술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 해외 유학까지 맡긴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듬해인 1422년, 조선으로 돌아온 장영실 등은 세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들은 각종 천문 관련 서적을 들여왔고, 흠경각과 보루각의 제도에 대해서도 폭넓게 연구하였다. 세종은 곧 ‘양각(兩閣) 혼의성상도감(渾儀成象都監)’을 설치해 흠경각과 보루각, 혼천의 등을 제작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

실록을 보면, 1422~1423년경 세종은 장영실을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고[免賤 면천], 궁궐 물품을 맡는 부서인 상의원(尙衣院)에 임명하려 했다. 이를 두고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 등의 의견이 갈렸다.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둘 수 없다”며 반대했고, 조말생은 “장영실 같은 인물이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찬성했다. 조정의 반대가 만만치 않자 세종은 잠시 뜻을 거두었지만, 끝내 영의정 유정현 등과 다시 논의해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임명했다. 소나 말처럼 재산으로 여겨지던 노비 출신 인물을 정5품 관직에 올린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신분보다 능력을 앞세우겠다는 세종의 분명한 선언이었다.
(* 드라마 <대왕 세종> 방영 당시, 제작진이 장영실의 상의원 별좌 임명 시기를 물어온 적이 있다. 나는 “정확한 시점은 분명하지 않지만, 장영실의 관직이 1425년(세종 7) 무렵 사직(司直)이었다는 세종의 회고를 토대로 상의원 별좌 임명은 그 이전이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드라마에서는 세종이 장영실에게 직접 관복을 내려주며 “이것은 상이 아니라 족쇄이자 무기다. 세상의 편견에 굴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기라”고 격려한다. 이어 “책임을 지웠으면 권한 또한 주어야 영이 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록 극적 상상력이 더해졌지만 세종의 인재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다.)

세종이 장영실을 대하는 가장 극적인 장면은 1433년(세종 15) 9월 16일 기사에 나온다.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한 장영실의 공을 논하면서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래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 만대에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 정4품)의 관직을 더해주고자 한다”(세종실록 15년 9월 16일). 특이하게도 이 때에는 별다른 반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데, 이는 면천과 달리 승진은 국왕의 재량에 해당하기 때문인 듯 하다. 여기에 황희 정승의 찬성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황희는 ‘평양의 관노였다가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서 태종에 의해 특별히 호군으로 제수된 김인(金忍)의 전례’를 들어 장영실의 승진에 힘을 실어주었다.

나는 세종의 말 가운데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若非此人 약비차인]”이라는 구절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자격루의 발상이 왕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스스로를 자랑하는 대신 그것을 만들어 내는 장영실의 정교한 솜씨와 헌신을 칭찬하며 감사했다. “만대에 전할 기물”의 공을 자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돌린 것이다. 이에 대한 장영실의 보답도 놀랍다. 옥루(玉漏)라는 임금 전용의 당대 최고의 자동 물시계를 제작해 올린 것이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따르면, 흠경각은 강녕전과 경회루 사이에 설치되었는데, 건물 안에 종이를 뭉쳐 산을 만들고 그 위에 사신(四神)·십이지신·북치는자·종치는자·사신(司辰)·옥녀(玉女) 등을 배치하여, 모든 장치가 사람의 힘 없이 스스로 움직이고 종을 치며 시간을 알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신묘하여 마치 “귀신이 그렇게 하는 듯하였다”고 했다. 한밤중,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저절로 움직이고 소리가 나는 광경을 본 궁중 사람들은 “귀신이 산다”고 두려워할 정도였다.

‘신분질서가 붕괴되면 곧 나라가 망한다’며 강력히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발탁해 준 왕, 그리고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안 되었다”고 공을 인정해 준 임금을 위해, 장영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 물시계 건물을 세운 것이다. 1433년부터 1438년(세종 20) 1월 흠경각이 완성될 때까지 6년 동안, 장영실은 얼마나 신나게 일했을까. 감사와 칭찬이 한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깊이 움직이고, 결국 얼마나 놀라운 성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우리 사회는 해마다 10월이 되면 노벨상 소식으로 떠들썩하다. “왜 우리는 일본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이 반복된다. 그러나 답은 멀리 있지 않을지 모른다. 세종은 재능을 신분보다 앞에 두었고, 인재에게는 파격적인 발탁과 아낌없는 지원을 주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이라고 공개적으로 공을 인정하며,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겨주었다. 그런 풍토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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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 박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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