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세종이 실천한 기업가정신을 ‘사람을 중심에 둔 리더십(humane-centered leadership)’이라 부를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종의 사람 중심 리더십은 크게 백성 차원과 신하, 곧 인재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성 차원에서 세종은 백성을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나 정책의 수혜자로 보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하늘이 낸 백성[天民]’, 곧 국가의 뿌리이자 근본으로 인식했다. 세종 시대 사람들은 “하늘의 눈은 우리 백성의 시선에서 비롯되고, 하늘의 귀 역시 우리 백성이 듣는 데서 시작된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고 여겼으며(세종실록 20/1/7), 세종은 특히 사회적으로 가장 신분이 낮은 노비조차도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세종실록 26/윤7/24).
이처럼 백성을 ‘하늘 백성’으로, 임금의 직책을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일[人君之職 代天理物]’로 이해했기에, 세종과 그 시대 인재들은 백성의 삶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두었다. 법과 제도, 행정과 시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주요 사안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백성에게 전달하려 했던 노력은,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공공 정보의 투명성을 구현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신하 곧 인재 차원에서 세종은 소통의 원활함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그는 하늘이 맡긴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길은, 뛰어난 인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과 소명을 다할 때 비로소 열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재의 말을 끝까지 듣고, 그들에게 신뢰와 재량을 부여하는 데 힘썼다.
세종이 말한 ‘말의 소통’(意思疏通)이란, 어전회의에서 인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서로 논박하며 생각을 다듬되, 그 가운데 가치 있는 제안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도록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그러한 제안이 현실이 되도록, 국정의 핵심 자리에 적임자를 배치하는 ‘자리의 소통’(適所適材)에도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성과가 말해준다 ― 세종시대 과학기술 성과의 세계사적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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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훌륭한 리더의 중요한 조건은 탁월한 성과다. 그렇다면 세종은 과연 성공적인 리더였나?
아무리 과정이 모범적이라 하더라도 결과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리더십은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리더십의 진가는 결국 성과(performance)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서 볼 때, 세종의 통치는 과정과 성취를 동시에 달성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성과는 세계사적으로도 압도적이다. 일본의 이토 준타로(伊東俊太郞) 등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사전(科學史技術史事典)》에 따르면, 세종 재위 기간(1418~1450) 동안 조선의 과학기술 성과는 총 21건으로 집계된다. 이는 동시대 중국의 4건은 물론, 유럽과 아랍을 포함한 다른 모든 지역의 성과 19건을 합친 수를 웃도는 규모다(C4J0K21O19). 세종 시기 조선의 기술적 수준이 동시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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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학기술 성과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기술 진보를 넘어 세종이 직면한 시대적 불안을 해결하는 핵심 수단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창업기의 혼란을 수성기의 안정으로 전환하지 못할 경우 왕조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에 그는 국가적 핵심 과제로 ① 대외적 안전 확보(Security), ② 민생 기반 안정(Food), ③ 국가 위상 확립(National Prestige)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세종 시기의 21건의 과학기술 성과를 이 기준으로 분류해 보면, 민생 관련 성과가 57%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12건), 국격 제고가 33%(7건), 국방 관련 성과는 10%에(2건) 그친다. 이는 세종이 기술혁신을 과학 자체의 진보에 머무르지 않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며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공공적 가치 창출의 수단, 곧 국가 차원의 R&D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국방 분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태종시대에 이미 북방과 남방의 외교 질서가 정립되어 외침의 빈도가 크게 줄어든 역사적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박현모, <태종평전> 2022, 248–253쪽). 요컨대,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 성과는 민생 안정, 국방 강화, 국격 제고라는 시대적 핵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자 실질적 해법이었다. 이는 기술 혁신이 곧 통치 철학의 실천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세종 정부가 당면한 구조적 문제를 단순한 응급 조치가 아닌 제도적 혁신과 과학적 접근을 통해 해결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21건에 이르는 과학기술 성과의 규모와 질적 수준은, 동시대 어떤 국가와 비교하더라도 세종 정부가 국가 문제 해결 능력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證左)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종은 어떻게 그러한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가. 이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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