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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2호] K-기업가정신의 원형, 세종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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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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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기업가정신의 원형, 세종 리더십

 

요즘 K-기업가정신이 화두다.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K-기업가정신의 뿌리를 남명 조식에게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있으나 ‘K-기업가정신의 원류’를 찾으려는 시도는 귀중한 것으로서, 본지에서는 앞으로 몇회에 걸쳐 기업가정신의 관점에서 세종리더십을 재조명하는 글을 연재한다 _ 편집자 주

기업은 흔히 ‘이윤을 창출하는 곳’으로 이해되지만, 이는 기업의 본질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파악한 관점이다. 김기찬 교수는 “기업은 세상의 문제를 가장 생산적으로 해결하는 조직”이라고 정의한다(세종실록아카데미 특강 2025.9.4.). 다시 말해, 기업의 존재 목적은 단순한 이익 추구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의 창의적 해결에 있으며, 그러한 생산적 해결의 과정 속에서 경제적 가치가 자연스럽게 창출된다는 것이다.

김기찬 교수의 이러한 통찰에 힘입어, 나는 조선의 군주 세종의 리더십을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다.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왕과 재상, 그리고 수령들의 문제해결과정을 추려내고, 그 중 가장 창의적인고 생산적인 사례를 분석했다. 그 결과 세종은 조선이라는 ‘왕조 주식회사’의 최고경영자로서, 32년 동안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며, 당대의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가장 생산적 방식으로 해결해 낸 ‘조선의 기업가정신 실천자’라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기업가정신의 텍스트로서 『세종실록』 읽기

‘왜 조선왕조냐?’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조선왕조 500여 년의 역사는 단순히 ‘잘했다–못했다’는 이분법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오늘날의 리더십과 조직 운영을 위해 배울 점이 많은 거대한 학습 데이터셋이라 생각한다. 역사를 도덕적 판결의 장으로 삼기보다, 하나의 텍스트(text)로 읽고 그 속에서 배울 점과 반면교사를 함께 찾으려는 게 내 역사 독해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건희 회장이 강조한 “역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생(生)데이터”라는 통찰과 맥을 같이한다. 기업이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하여 미래의 전략을 설계하듯, 역사 또한 선조들이 남긴 실험과 실패, 그리고 혁신의 궤적을 압축한 집합적 데이터로서 오늘의 의사결정과 조직 설계에 실질적인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K-기업가정신의 관점에서 『세종실록』에 나타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분석하려고 한다. K-기업가정신은 기본적으로 한국 기업인의 내면을 고양시키고 신명나게 만드는 창조적 정신 요소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K-기업가정신은 한국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서구를 비롯한 타 문화권의 기업가정신과 비교·분석할 수 있는 토대로도 활용될 수 있다. 나아가 세종의 사례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기업가정신의 핵심 요소—①문제 정의(당대의 시대적 불안요소 진단) ②소통(자리 소통과 말의 소통)–③가치 구현(인재들이 금지된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게 도와줌)—를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오늘날 모든 리더에게 요구되는 질문 역량의 함양 방안을 세종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세종은 공동체가 직면한 핵심 문제를 단순히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질문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재정의하고, 말과 일을 잇고 살려내며, 새로운 해법을 창출하는 소통의 혁신가였다. 그의 ‘창의적 질문’은 곧 기업가정신의 출발점이자 리더십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나는 다섯 가지 탐구적 질문(exploratory questions)을 제시하고, 각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세종의 기업가정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탐색의 과정은 두 축으로 나뉜다. 그 한 축은 ‘왜 세종의 사람중심 기업가정신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세 가지 핵심 질문을 던진다. ① 사람중심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② 세종은 성공적인 리더였는가? ③ 그러한 성과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다른 한 축은 ‘세종의 사람중심 기업가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이다. 역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질문으로 나아간다. ④ 세종의 리더십은 현대 경영학의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가? ⑤ 현대의 리더들은 이를 어떻게 학습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 이 다섯 가지 질문은 역사적 리더십을 K-기업가정신으로 재해석하기 위한 잠정적 가설이자, 세종의 리더십을 현대 경영학적 맥락 속에 재맥락화하려는 장치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의 소통, 자리의 소통 ― 세종 사람중심 리더십의 두 차원

질문1. 세종이 실천한 기업가정신을 ‘사람을 중심에 둔 리더십(humane-centered leadership)’이라 부를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종의 사람 중심 리더십은 크게 백성 차원과 신하, 곧 인재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성 차원에서 세종은 백성을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나 정책의 수혜자로 보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하늘이 낸 백성[天民]’, 곧 국가의 뿌리이자 근본으로 인식했다. 세종 시대 사람들은 “하늘의 눈은 우리 백성의 시선에서 비롯되고, 하늘의 귀 역시 우리 백성이 듣는 데서 시작된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고 여겼으며(세종실록 20/1/7), 세종은 특히 사회적으로 가장 신분이 낮은 노비조차도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세종실록 26/윤7/24).
 
이처럼 백성을 ‘하늘 백성’으로, 임금의 직책을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일[人君之職 代天理物]’로 이해했기에, 세종과 그 시대 인재들은 백성의 삶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두었다. 법과 제도, 행정과 시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주요 사안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백성에게 전달하려 했던 노력은,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공공 정보의 투명성을 구현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신하 곧 인재 차원에서 세종은 소통의 원활함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그는 하늘이 맡긴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길은, 뛰어난 인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과 소명을 다할 때 비로소 열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재의 말을 끝까지 듣고, 그들에게 신뢰와 재량을 부여하는 데 힘썼다.
 
세종이 말한 ‘말의 소통’(意思疏通)이란, 어전회의에서 인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서로 논박하며 생각을 다듬되, 그 가운데 가치 있는 제안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도록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그러한 제안이 현실이 되도록, 국정의 핵심 자리에 적임자를 배치하는 ‘자리의 소통’(適所適材)에도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성과가 말해준다 ― 세종시대 과학기술 성과의 세계사적 비교

질문2. 훌륭한 리더의 중요한 조건은 탁월한 성과다. 그렇다면 세종은 과연 성공적인 리더였나?


아무리 과정이 모범적이라 하더라도 결과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리더십은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리더십의 진가는 결국 성과(performance)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서 볼 때, 세종의 통치는 과정과 성취를 동시에 달성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성과는 세계사적으로도 압도적이다. 일본의 이토 준타로(伊東俊太郞) 등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사전(科學史技術史事典)》에 따르면, 세종 재위 기간(1418~1450) 동안 조선의 과학기술 성과는 총 21건으로 집계된다. 이는 동시대 중국의 4건은 물론, 유럽과 아랍을 포함한 다른 모든 지역의 성과 19건을 합친 수를 웃도는 규모다(C4J0K21O19). 세종 시기 조선의 기술적 수준이 동시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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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학기술 성과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기술 진보를 넘어 세종이 직면한 시대적 불안을 해결하는 핵심 수단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창업기의 혼란을 수성기의 안정으로 전환하지 못할 경우 왕조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에 그는 국가적 핵심 과제로 ① 대외적 안전 확보(Security), ② 민생 기반 안정(Food), ③ 국가 위상 확립(National Prestige)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세종 시기의 21건의 과학기술 성과를 이 기준으로 분류해 보면, 민생 관련 성과가 57%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12건), 국격 제고가 33%(7건), 국방 관련 성과는 10%에(2건) 그친다. 이는 세종이 기술혁신을 과학 자체의 진보에 머무르지 않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며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공공적 가치 창출의 수단, 곧 국가 차원의 R&D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국방 분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태종시대에 이미 북방과 남방의 외교 질서가 정립되어 외침의 빈도가 크게 줄어든 역사적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박현모, <태종평전> 2022, 248–253쪽).
 
요컨대,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 성과는 민생 안정, 국방 강화, 국격 제고라는 시대적 핵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자 실질적 해법이었다. 이는 기술 혁신이 곧 통치 철학의 실천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세종 정부가 당면한 구조적 문제를 단순한 응급 조치가 아닌 제도적 혁신과 과학적 접근을 통해 해결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21건에 이르는 과학기술 성과의 규모와 질적 수준은, 동시대 어떤 국가와 비교하더라도 세종 정부가 국가 문제 해결 능력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證左)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종은 어떻게 그러한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가. 이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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