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일하는 방식인 ① 널리 묻고(廣問 광문), ② 멈추어 함께 생각하며(徐思 서사), ③ 깊이 따져 실행 가능한 대안을 마련하고(精究 정구), ④ 마침내 제도로 확정해 일관되게 실행하는(專治) 흐름으로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널리 묻는 과정이다(廣問). 세종은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1430년, 고위 관료에서 여염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17만 2,806명을 대상으로 찬반을 묻는 전국적 여론 조사를 3월부터 8월까지 5개월간 실시했다. 세계 최초로 최대 규모의 전국적인 여론 조사는 비전공감 관점에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리들이 세금제도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으려 갔을 때 백성들은 “왜 세제를 바꾸려 하는가, 새 제도가 내게 어떤 점이 좋은지”를 물었을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백성과 관리 모두가 공법의 취지를 한층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비전은 홍보나 교육이 아니라, 질문과 응답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둘째, 멈추어 함께 생각하는 과정이다(徐思 서사). 여론 조사 결과, 전국적으로 찬성 쪽이 반대한 사람보다 2만 4,000여 명 더 많았다. 하지만 세종은 곧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겠으나, 우선 공법 찬성론자의 논리적 빈약—조건부 내지 병행론 주장—과 ‘조종의 법을 바꾸는’ 데 대한 부담(세종실록 18년 2월 23일), 그리고 황희 등 고위 관료들의 반대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비전 공감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종은 보류 기간 동안 공법 실시 여부를 어전 회의에서 계속 의논하게 하여, 예상되는 후유증을 면밀히 검토하게 했다. 1436년, 논의 과정에서 반대파였던 황희가 입장을 바꾸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은 상징적이다. 손실답험법의 폐해 심화, 국가 재정의 불안, 그리고 국왕의 일관된 방향 제시가 쌓이면서, 반대하던 이들까지 점차 설득되었다.
셋째, 깊이 따져 대안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과정이다(精究 정구). 세제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척박한 지역 백성들의 반대였다. 세종은 이를 무시하지 않았다. 제도를 보완하고,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생생지락이라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관리 목표로서 ‘전분 6등, 연분 9등’의 기준을 제시했다. 아울러 자연환경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적 기반도 함께 구축했다. 측우 기술을 발전시키고, 수차 등 농업 기술을 시험한 것은 제도의 실행력을 높이기 위한 준비였다. 개혁의 가장 큰 어려움은 결과의 불확실성이다. 얻을 이익은 미래의 것이고, 감수해야 할 부담은 현재의 것이다. 세종은 이 불안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대신 지속적인 토론과 숙의를 통해 불확실성을 줄이고, 합리적 대안을 축적해 나갔다.
넷째, 최종 확정과 일관된 추진 단계다(專治 전치). 세종은 오랜 논의 끝에 공법을 확정하고, 이를 국가의 공식 제도로 자리 잡게 했다. 1444년, ‘전분 6등과 연분 9등’을 골자로 한 공법은 이후 《경국대전》에 반영되어 법제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물론 제도가 확정된 이후에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흉년이 들거나 지역 여건이 악화될 때마다 공법에 대한 반대와 재검토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세종은 기본 원칙을 흔들지 않았다. 적정한 세액 책정이라는 기준으로 ‘수평’을 바로잡고, 민본이라는 핵심 가치에 ‘수직’을 세웠으며, 생생지락이라는 비전을 분명히 하고, 실정에 맞는 제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17년의 긴 토론’은 그렇게 수립된 비전을 공감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종은 신료들의 의논에 그치지 않고, 이해 당사자인 신민 일반에게도 의견을 표명할 기회를 주어 개혁안의 실행력을 높였다. 이 과정을 통해 정책의 후유증과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한편, 결정의 정당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 나아가 개혁 반대자들까지도, 그 결정이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이렇게 마련된 세금 제도는 조선 후기 영조 때까지 약 300년간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