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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23호] 혁명보다 어려운 세제 개혁, 세종은 어떻게 비전을 공감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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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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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왜 이렇게 많은 시계를 만드셨을까?”
경기도 여주 세종영릉을 찾을 때마다 떠오르는 물음이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걸어가면 오른편에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많이 띄는 것이 시간 측정 기구들이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自擊漏)라는 물시계, 오목한 솥 모양으로 하늘을 담아낸 앙부일구(仰釜日晷), 구슬을 매달아 수평을 맞추는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 나침반 없이도 남쪽을 정해 시간을 재는 정남일구(定南日晷). 이들 기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헤아리려 한 노력의 결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세종이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다. 낮에는 해의 그림자로, 밤에는 별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헤아려 밤낮의 경계를 넘어선 기구다. 만원권 지폐 뒷면에 그려진 혼천의(渾天儀)를 들여다볼 때면,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통해 시간을 읽어내던 600여 년 전 사람들의 우주관이 생생히 다가온다.

시간을 재는 기구, 질서를 세우는 기술

얼마 전, 고(古)천문학을 전공한 분과 함께 영릉의 과학기술 기구들을 둘러보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그 기구들을 설치하는 ‘순서’였다. 단순한 제작 기술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맞추는 하나의 질서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앙부일구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먼저, 설치할 장소를 정하고 물을 이용해 바닥을 정확히 수평으로 맞춘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출발점이다. 다음으로, 실에 추를 달아 수직을 잡는다. 수평만으로는 부족하다. 위와 아래가 바로 서야 기준이 선다. 이어, 막대(影針 영침)를 세워 그림자로 남북 방향을 정한다. 북극성으로 대략의 방향을 잡고, 낮에 태양으로 정확하게 바로잡는다. 하루 중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순간의 방향이 곧 남북이다. 마지막으로, 지역에 맞게 각도를 조정한다. 이를 위도에 맞춘다고 하는데, 한양의 경우 약 37도에 해당하는 각도로 보정한다.
 
(* 전통시대에 북극고도를 맞추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위의 ③ 단계(이어)에서 남과 북을 찾았다고 가정한다. 이때 북을 자(子), 남을 오(午)라 한다. 관측자를 중심으로 머리 위를 천정이라 하고, 자에서 천정을 지나 오를 잇는 가상의 선을 자오선이라 한다. 이제 북극성을 찾아아야 하는데, 북극성은 하루에 두번 자오선을 지난다. 가장 높이 떠서 지날때가 있고, 가장 낮게 떠서 지날때가 있다. 두 높이의 고도를 평균내면, 그곳이 북극이다. 지면에서 북극까지의 고도를 북극고도라 하며, 이 북극고도가 위도이다.)

세종이 비전을 세우는 순서

나는 그 설명을 듣는 내내, 이 설치 ‘순서’가 하나의 리더십 메타포로 다가왔다. 특히 세종이 세제 개혁을 추진하며 비전을 세우고, 구성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던 과정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먼저, 바닥을 수평으로 맞추는 단계는 기존 제도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는 일에 해당한다. 당시 시행되던 손실답험법은 가을마다 관리가 들판에 나가 수확량을 살펴 세금을 매기는 제도였다. 그러나 기준이 모호하고 집행이 자의적이어서, 세금의 많고 적음이 공정하게 정해지지 못했다. 백성은 부담을 덜기 위해 관리에게 접대를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비용과 폐단이 생겼다. 세종이 “세액의 경중이 적중하지 못하고 폐단이 적지 않다”고 지적한 이유다(세종실록 12년 3월 5일). 이미 제도는 균형을 잃고 있었다. 새로운 기준으로 ‘수평’을 다시 맞출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 수직을 세우는 단계는 판단의 기준, 즉 핵심 가치를 분명히 하는 일과 닮아 있다. 세종이 의사결정을 내릴 때의 기준은 늘 분명했다. 민본, 곧 백성이다. 그는 백성을 나라의 뿌리로 보았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앙부일구에도 일단 설치되면 수직의 추는 없앤다), 뿌리가 약해지면 줄기와 가지도 함께 쇠한다. 그렇기에 어떤 제도가 좋은가를 가르는 기준은 바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가, 아니면 고통을 더하는가 였다. 이 기준에서 보면 손실답험법은 이미 방향을 잃고 기울어져 있는 제도였다. 국가 재정을 허소(虛疎)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문제였다. 세종은 백성의 부담과 국가 재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추를 움직이며 균형을 잡았다.
 
세 번째, 방향을 정하는 과정은 비전을 세우는 일에 해당한다. 세종이 지향한 방향은 ‘생생지락’이었다. 모든 백성이 삶의 터전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나라, 억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질서다. 그는 이 비전을 공법이라는 제도로 구체화하고 싶어했다. 수확량에 따라 들쭉날쭉하던 세금을 일정하게 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농사에 전념하는 나라를 만들려 했다. 나아가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한 나라”라는 구체적인 모습까지 그려 보였다. 방향이 분명했기에 그 정책은 17년이나 진전과 멈춤을 계속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각도를 조정하는 단계는 현실에 맞게 제도를 다듬는 과정과 닮아 있다. 세종은 공법을 한 번에 밀어붙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평년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일정량을 바치게 하는 제도”(세종실록 28년 4월 30일)를 구상했지만, 이는 지역마다 다른 토지의 비옥도와 해마다 달라지는 풍흉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세종은 백성의 의견을 듣고, 지방 수령과 관리들의 보고를 참고하며 제도를 점차 현실에 맞게 발전시켜 나갔다. 1436년에는 지역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세액을 달리하는 방안이 논의되었고(전분 차등 납세), 1444년 최종안에서는 해마다의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는 방식이 확정되었다(연분 차등 납세). 아울러 그는 시행 방식에서도 신중했다. 자연환경이 열악한 지역의 부담을 고려해, 작황이 나아질 때를 기다리며 기근이 덜한 지역부터 단계적으로 실시했다. 비전은 분명하게 세우되, 실행은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맞게 조율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더욱 주목할 점은 비전을 공감시키는 리더십이다. 오늘날 많은 조직에서 비전은 외워야 할 문구이거나,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으로 여겨지곤 한다. 비전을 세우는 데는 힘을 쏟지만, 공감시키는 데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어떻게 수많은 반대와 장애 속에서도 새로운 세제를 안착시킬 수 있었을까.

비전공감의 네 단계

세종의 일하는 방식인 ① 널리 묻고(廣問 광문), ② 멈추어 함께 생각하며(徐思 서사), ③ 깊이 따져 실행 가능한 대안을 마련하고(精究 정구), ④ 마침내 제도로 확정해 일관되게 실행하는(專治) 흐름으로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널리 묻는 과정이다(廣問). 세종은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1430년, 고위 관료에서 여염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17만 2,806명을 대상으로 찬반을 묻는 전국적 여론 조사를 3월부터 8월까지 5개월간 실시했다. 세계 최초로 최대 규모의 전국적인 여론 조사는 비전공감 관점에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리들이 세금제도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으려 갔을 때 백성들은 “왜 세제를 바꾸려 하는가, 새 제도가 내게 어떤 점이 좋은지”를 물었을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백성과 관리 모두가 공법의 취지를 한층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비전은 홍보나 교육이 아니라, 질문과 응답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둘째, 멈추어 함께 생각하는 과정이다(徐思 서사). 여론 조사 결과, 전국적으로 찬성 쪽이 반대한 사람보다 2만 4,000여 명 더 많았다. 하지만 세종은 곧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겠으나, 우선 공법 찬성론자의 논리적 빈약—조건부 내지 병행론 주장—과 ‘조종의 법을 바꾸는’ 데 대한 부담(세종실록 18년 2월 23일), 그리고 황희 등 고위 관료들의 반대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비전 공감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종은 보류 기간 동안 공법 실시 여부를 어전 회의에서 계속 의논하게 하여, 예상되는 후유증을 면밀히 검토하게 했다. 1436년, 논의 과정에서 반대파였던 황희가 입장을 바꾸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은 상징적이다. 손실답험법의 폐해 심화, 국가 재정의 불안, 그리고 국왕의 일관된 방향 제시가 쌓이면서, 반대하던 이들까지 점차 설득되었다.
 
셋째, 깊이 따져 대안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과정이다(精究 정구). 세제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척박한 지역 백성들의 반대였다. 세종은 이를 무시하지 않았다. 제도를 보완하고,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생생지락이라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관리 목표로서 ‘전분 6등, 연분 9등’의 기준을 제시했다. 아울러 자연환경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적 기반도 함께 구축했다. 측우 기술을 발전시키고, 수차 등 농업 기술을 시험한 것은 제도의 실행력을 높이기 위한 준비였다. 개혁의 가장 큰 어려움은 결과의 불확실성이다. 얻을 이익은 미래의 것이고, 감수해야 할 부담은 현재의 것이다. 세종은 이 불안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대신 지속적인 토론과 숙의를 통해 불확실성을 줄이고, 합리적 대안을 축적해 나갔다.
 
넷째, 최종 확정과 일관된 추진 단계다(專治 전치). 세종은 오랜 논의 끝에 공법을 확정하고, 이를 국가의 공식 제도로 자리 잡게 했다. 1444년, ‘전분 6등과 연분 9등’을 골자로 한 공법은 이후 《경국대전》에 반영되어 법제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물론 제도가 확정된 이후에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흉년이 들거나 지역 여건이 악화될 때마다 공법에 대한 반대와 재검토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세종은 기본 원칙을 흔들지 않았다. 적정한 세액 책정이라는 기준으로 ‘수평’을 바로잡고, 민본이라는 핵심 가치에 ‘수직’을 세웠으며, 생생지락이라는 비전을 분명히 하고, 실정에 맞는 제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17년의 긴 토론’은 그렇게 수립된 비전을 공감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종은 신료들의 의논에 그치지 않고, 이해 당사자인 신민 일반에게도 의견을 표명할 기회를 주어 개혁안의 실행력을 높였다. 이 과정을 통해 정책의 후유증과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한편, 결정의 정당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 나아가 개혁 반대자들까지도, 그 결정이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이렇게 마련된 세금 제도는 조선 후기 영조 때까지 약 300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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