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야기3] 고대 로마인과 세종이 실천한 시스템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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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은 폴리비오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기원전 167년, 로마로 끌려온 그리스 출신 지식인 폴리비오스가 17년간 로마를 관찰하며 갖게 된 강력한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국 그리스는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는데, 왜 로마는 갈수록 융성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을 붙잡고 20여 년에 걸쳐 쓴 책이 바로 유명한 『역사』(The Histories)인데, 결론은 ‘제도’였다. “인간의 기분만큼 변덕스러운 것은 없는데” 로마인들의 정신이 건전해서 로마가 융성했고, 타락해서 쇠퇴했다는 식의 논법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게 시오노 나나미의 생각이었다.
고대 로마를 융성시킨 비결은 ‘제도’
폴리비오스가 간파한 로마 제도의 핵심은, 간단히 말해 ‘질(質)의 리더십’과 ‘양(量)의 팔로어십’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였다. 즉, 전시(戰時)와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1~2인의 집정관이 신속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한 제도, 그리고 국정 토론기구이자 짧은 임기의 집정관을 배출하는 종신 임기의 원로원은 ‘질의 리더십’에 해당한다. ‘최고로 우수한 자’(집정관)와 ‘보다 뛰어난 사람들’(원로원)이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제도화해낸 구조였다.
이에 비해,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된 민회는 ‘양(量)의 팔로어십’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였다. 정부의 관리를 선출하고, 입안된 정책을 승인하며, 전쟁과 강화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보통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선출한 지도자의 정책을 따를지 말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울지를 결정하는 문제처럼, 팔로어십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사안은 시민 공동체가 직접 책임지도록 한 셈이다. 이처럼, 결정권을 공동체의 최고 1인(best) 또는 상대적으로 뛰어난 소수(better)에게 맡길 것인지, 아니면 대다수 선량한 사람들(good)의 신중한 판단에 따를 것인지를 고민한 고대 로마 공화정의 원리는, 오늘날 대통령제·의회제·배심원 제도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세종 사후 신하들이 꼽은 ‘세종치세 3대 비결’ 중 하나인 ‘제도명비(制度明備)’, 즉 “제도를 밝게 갖추었다”는 평가는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세종이 사망한 1450년 2월의 실록 기사에는, “재위 30여 년 동안 백성들이 전쟁을 겪지 않았고, 즐겁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비결로는 ① 현능(賢能)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인재 경영, ②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국사를 기획하는 지식 경영, ③ 현능한 인재가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한 시스템 경영이 꼽힌다.
세종이 정비한 제도는 엄밀히 말해 하드웨어라기보다 소프트웨어에 가깝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왕조의 통치구조는 태종 시대(1401~1418년)에 거의 완성되었다. “태조 시대의 정치는 강력한 왕권을 지닌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조준·정도전 등 소수 재신(宰臣)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유교 정치의 기틀은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데 비해, 태종 시대에는 도평의사사 대신 의정부가 설치되고 사병이 혁파되는 등 “정치체제가 갖추어졌다”고 평가된다(이존희 <한국사 23: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탐구당: 2003, 2쪽). 물론 세종 시대에도 궁궐 공사는 계속되었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에 지금의 창경궁 자리에 상왕 태종의 거처인 수강궁(壽康宮)을 지었으며, 1422년에도 도성 성곽을 다듬고 쌓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더 큰 관심은 이미 갖추어진 정치체제의 운영 방식과 한양 도성에 사는 백성들의 생활 양식에 집중되었다.
‘세종이 예제를 정비했다’는 말의 의미
아무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인체가 완벽히 복원되었다 하더라도, 환자가 제대로 숨 쉬지 못하고 혈액이 원활히 순환하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듯, 나라 역시 창업 이념에 따라 안정적으로 운영될 때 비로소 혁명과 건국의 의미가 살아난다. 종종 “수성(守成)이 창업(創業)보다 어렵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종이 오례의(五禮儀), 즉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라는 다섯 가지 의례를 정비하고, 해시계와 물시계 등을 만들어 백성들이 일상에서 시간을 인식하며 살아가게 한 점, 그리고 집현전이라는 싱크탱크를 세워 국가 비전을 설계하게 한 일은 모두 바로 그 목표를 향한 노력이었다. 다시 말해, 세종은 신민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걷도록 이끈 임금이었다. 훗날 율곡 이이는 “세종 시대에 들어 예제가 정비되었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조선왕조가 본격적인 수성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국가경영의 관점에서 세종이 가장 잘 정비한 예제라면, 역시 어전회의의 활성화라 할 수 있다. ‘어전회의 수준이 곧 국격(國格)의 수준’이라 본 세종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이래 이어져 온 회의를 창의적으로 혁신하고자 했다. 새 제도를 만드는 데서가 아니라 이미 시행 중인 제도[已立之法] 중 하나를 뛰어나게 발전시키는[申明] 데서 혁신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세종실록 25년 10월 16일). 이런 취지로 세종은 이전 임금들이 형식적으로 운영하던 경연(經筵)회의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참석한 ‘상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창의적 토론을 펼치도록 했다. 더불어 세종은 ‘모든 의견을 듣되 최종결정은 왕이 독자적으로 내리는’ 회의 전통을 확립했다. 이는 ‘질(質)의 리더십’이 발휘될 조건을 제도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세종 사후에도 수백 년간 이어진 경연회의 존재는, 자질이 부족한 군주가 등장할 때에도 뛰어난 인물들이 집단지혜(group genius)를 발휘해 국정을 이끌도록 한 시스템 경영의 산물로 평가된다.
중요한 것은 집단지혜가 발휘될 수 있는 조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강점이 서로 다른 여러 사람이 한곳에 모여야 한다는 점(meet together)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 사이에 열띤 토론(violent discussion)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강점을 지닌 이들이 공통의 목적 아래 함께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일 때, 탁월한 한 사람이 내린 결정에 못지않을 뿐 아니라, 대체로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Aristotle, Politics, book 3, ch. 11).
리더가 결정 내릴 때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음식과 잔치에 비유했다. ‘여러 식자재를 섞어 만든 혼합 음식이 소량의 순수한 식자재만 넣은 음식보다 영양가가 높듯,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 연 잔치가 한 사람의 비용으로 열린 잔치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고 했다. 서로 다른 강점을 지닌 사람들이 공동의 문제 해결에 몰입할 때 최선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결론이 최선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기준은 특정 전문지식보다는 대다수 사람의 감각(sense)과 의견(opinion)인 경우가 많다. “건물에 대한 최종 평가는 건축가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활할 사람들이 내리며,” 차려진 음식의 최종 평가자 역시 “요리사가 아니라 손님”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국가나 기업의 리더가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유에는 빠진 요소가 하나 있다. 요리사가 손님의 취향에 맞춰 음식을 정성껏 만들고, 건축가가 건축주를 감동시킬 집을 짓게 만들려면,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여리사와 건축가를 움직일 인센티브가 중요하다. 그 점에서 세종은 탁월했다. 그는 유능한 인재들이 백성을 위해 실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동기를 제도 속에 심어두었다. 단순히 의견을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집단지혜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과 유인을 함께 설계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