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야기 4] 인재를 몰입시킨 세종의 파격적 인센티브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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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와 그 가족까지 품은 확장된 포용 리더십
김종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북쪽 변방에서 7년간 근무하는 동안, 세종은 김종서의 노모가 작은 병이라도 앓으면 온갖 의약과 음식을 내려주었고(세종실록 18년 1월 21일), 그의 아내에게도 같은 혜양을 베풀었다. “김종서의 아내가 공주에 살며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니, 어육의 종류를 따지지 말고 계속 보내어 잘 보살피라”(세종실록 21년 윤2월 11일)는 지시가 그것이다.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에 감동한 김종서의 어머니는 휴가 나온 아들에게 “네가 성상께 충성을 다한다면 나는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다”(세종실록 18년 1월 21일)고 말했다. 하경복의 동생 하경리가 왕에게 올린 ‘감사의 글’도 비슷하다. “신의 어머니께서 성상의 은혜를 입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네 형 하경복의 변방 근무로 인해 나를 부양할 자가 없음을 임금께서 걱정하시어, 너를 인근 고을로 특별히 제수하셨다. 너희 형제가 마음을 다해 직무를 수행해서 성상의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세종실록 8년 7월 18일). 한마디로 세종은 인재와 왕 개인 간의 관계를 넘어, 조직 전체의 신뢰와 안정 기반을 다지는 ‘확장된 포용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셋째는 인재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와 격려를 전했다. 1424년 11월, 하경복 장군에게 보낸 편지가 좋은 예다.
“야전 생활에 수고가 많겠구나. 경이 진에 부임할 때, 변방의 경보가 급해 명을 받고 곧바로 떠나 노모를 뵐 겨를도 없었을 터이다. 내 이를 매우 민망히 여겨 사람을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음은 경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경이 북쪽 국경을 지키기 시작한 이래, 변경이 날로 안정되었다. 외적이 침입했을 때, 경이 매번 격퇴하여 변방 백성들이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군사들이 경의 위엄과 은혜에 익숙하고, 적들은 경의 용맹과 병법을 두려워한다. 임기가 차서 경의 직책을 바꿔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도 경을 대신할 만한 장수가 없다. 부디 그곳에 좀 더 머물러서 나의 북쪽 걱정을 덜어주기 바란다. 겨울날이 추우니 근일 편안히 지내라. 다른 말은 더하지 않는다.”(세종실록 6년 11월 29일)
이 편지에서 세종은 하경복이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의 안부를 전해 그를 안심시키고, 그간의 공로(국경방어, 백성 안심)를 칭찬하였다. 임기 만료로 후방으로 옮겨주어야 하나 “경과 바꿀 만한 인재가 없다”며 조금 더 수고해 달라고 당부한 뒤, 건강을 살피라는 다정한 당부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하경복은 결국 변방에서 15년간 근무하였다.) 김종서와 하경복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세종은 인재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와 형제까지도 귀하게 보살폈다. 그 덕분에 인재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맡은 일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세종 중반부인 1432년(세종 14년) 실록에는 “요즘은 인재가 매우 왕성하여 행정을 잘하는 자나 무예에 뛰어난 자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들은 모두 관직에 나아가기를 원한다”[今人才極盛 治事之才 武藝之士頗多 皆願從仕]”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의 열린 인재 등용 정책이 낳은 결실을 보여주는 증좌(證左)다.
신상필벌의 제도화와 능력 중심 인사철학의 실천
그런데 세종이 인재들에게 인센티브만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 신뢰를 훼손하는 중대한 실책을 저지른 관리에게는 엄격히 처벌하였다. 한일 간 우호 관계를 깨뜨린 수군 지휘관 최완을 참형에 처한 일(세종실록 31년 4월 20일), 나라 곳간을 도둑질한 공직자 최맹온을 신하들의 반대에도 참형으로 단죄한 일(세종실록 7년 5월 19일), 진휼미를 훔친 수령 최세온 역시 참형에 처한 사례(세종실록 6년 8월 15일)가 대표적이다. 세종이 훙서할 때, 당대인들은 세종 치세의 비결의 하나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엄정함에서 찾았다.
신상필벌의 핵심은 제도화에 있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보상이나 처벌로 이어질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조치가 실제로 이뤄져야 한다. 특히 제도화는 자의적 포상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어떤 성과는 당대에 드러나지 않고, 다음 세대나 그 손자 세대에 이르러서야 결실을 맺기도 한다. 자신의 헌신이 후일이라도 정당하게 평가받을 것이라는 신뢰를 심어주어야 한다. 최고 권력자의 시혜가 아니라, 특허나 신분 안정처럼 제도적 보장이 뒷받침될 때 인재는 일에 몰입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세종이 맹인 음악가에게 ‘벼슬’이라는 인센티브를 부여한 일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1431년, 음악을 관장하던 관습도감의 책임자 박연은 시각장애인 음악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들은 이미 시대의 쓰임이 되고 있으니[旣爲時用 기위시용], 국가가 이들을 돌봄은 마땅한 일입니다.” 박연에 따르면, 관현악을 맡은 시각장애인들은 “대부분 외롭고 가난하여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이들[無告之人 무고지인]”이었다. 게다가 관현악을 익히는 일이 워낙 고되다 보니, 젊은 시각장애인들은 점차 점쟁이로 전업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점을 치면 오히려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가의 제례나 의식에 필요한 연주자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었고, 이대로 가면 “장차 시각장애인의 음악은 끊어지고 말 것”이라는 게 박연의 깊은 우려였다. 박연은 시각장애인 음악가들에게 정기 급여 외에 쌀을 특별히 하사하여 “권려하고 흥기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특히 그들에게 관직을 제수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이른바 세상의 버림받은 사람[天下之棄人]”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박연은 다음과 같은 등용 방침을 제시하였다. 오랫동안 공연에 종사해온 이에게는 동반 5품 이상의 명예직(檢職 검직)을, 젊고 총명하며 여러 악기에 능한 이에게는 7품 검직을 초임으로 주고, 연주 실력이 충분해지면 왕에게 직접 아뢸 수 있는 종6품 참직(參職)으로 승진시키자고 제안하였다. 시각장애인 음악가를 양성하여 국가에 기여하게 하고, 본인은 물론 자손들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파격적인 이 제안을 세종은 그대로 받아들였다(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세종의 결정은 단순한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재능 있는 이들을 제도 안에 품어 국가의 자산으로 길러낸 포용과 존중의 인사철학의 실천이었다. 장애 유무를 넘어 누구나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등용될 수 있다는 원칙이 600여 년 전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대한민국 인사 제도의 이정표로 삼을 만하다. 오늘날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에, 세종의 인센티브 제도는 지도자가 어떤 눈으로 인재를 바라보며, 어떤 철학으로 제도를 설계하느냐가 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