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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2호] 실록이 밝히는 세종시대 국방의 실체: 오해와 진실1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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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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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시대의 군대는 전투경찰 수준이었다.”

우리 역사에 소양이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조차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왕궁과 도성을 지키는 중앙군만이 그럴듯한 정예였을 뿐, 변방의 군대는 사실상 오합지졸에 가까웠다는 주장도 학술회의 뒷풀이에서 적잖이 회자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인식은 사실에 부합하는가.

 

이 문제에 답하려면 먼저 세종 시대의 대외 관계, 곧 외교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방과 외교는 서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으며, 한쪽의 성과와 한계는 반드시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세종의 외교 전략을 살핀 뒤 국방 체계를 논해야 비로소 전투경찰이라는 평가가 온당한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왜곡된 통념, 세종 군사력의 진실을 가리다

 

세종 시대의 대외 관계, 그중에서도 명나라와의 외교를 논할 때는 이영훈 교수의 비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필자와 세종 시대 노비 논쟁을 벌였던 이 교수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서 1433(세종 15) 3월의 어전회의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433년 도절제사 최윤덕이 동북으로 출정했을 때이다. 세종은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거나, 대오를 이탈한 군사를 모두 참(: 목을 벰)하는 군법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걱정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가장 늦게 도착한 자와 가장 멀리 이탈한 자만 참하자고 하였다. 그런 군대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군사에 대한 세종의 자애는 엉뚱하게 조선왕조의 군대를 허물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종에게서 정치와 인륜은 구분되지 않았다. 제후가 천자를 성심으로 섬길진대 무슨 독자 의지의 군국이 필요하단 말인가.”(163)

 

이 교수는 여기에서 세종이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거나 대오를 이탈한 군사를 모두 참()하는 군법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언급한 대목을 인용하며, “그런 군대가 과연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나아가 군사에 대한 세종의 자애는 엉뚱하게 조선 왕조의 군대를 허물고 있었는지 모른다고까지 평가하였다.

 

이는 왜곡된 인용이다. 실록을 보면, 이날 세종은 대신들을 불러 여진족 토벌을 위한 군량(軍糧) 준비와 명령 불복종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있었다. 특히 후자인 명령 불복종과 관련해 세종은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은 자나 대오를 이탈한 자를 모두 참하면 처벌받는 자가 자못 많을 것이고[受罪者頗多], 반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군령이 엄정하지 못할 터인데[軍令不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이 교수의 왜곡된 인용과 달리, 세종은 처벌 대상이 지나치게 많아질 우려와 군령이 느슨해질 위험을 함께 지적한 뒤, 그 균형점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를 대신들에게 물었다. 어디에서도 자애로움에 치우쳐 군대를 허문다는 식의 언급이나 의도를 찾을 수 없다. 더구나 이때 세종 정부가 단행한 파저강 토벌은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최윤덕이 이끄는 조선의 정예군사 15천 명은 그해(1433) 419일부터 9일 동안, 여진의 근거지를 소탕한 것이다(183명의 여진족 참살, 248명 생포. 아군 4명 사망). 승전 후에도 세종은 군공(軍功)을 냉정하게 구분해 포상의 기준을 세웠는데, “공을 과장한 자는 죄로 삼는다”(세종실록 15/6/6)고 한 그의 말에서 보듯, 그는 자애로움에 치우치기보다 정의로운 엄격함을 추구한 리더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종이 만약 이 교수가 말하듯 정치와 인륜을 구분하지 못한 왕이었다면, 파저강 정벌 직전(3) 대규모 온천 행차를 감행해 여진족을 안심시키는 기만책을 구사할 리 없다. 하물며 대규모 첩보조직을 운용한다는 발상은 더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당시 평안도 강변(江邊) 일대에서 상시 활동하던 첩보부대가 무려 540명에 이르렀다. 이는 병가(兵家)에서는 정직함만을 숭상해서는 안 되고, 부득이하면 기이한 술책도 겸용하여야 한다는 세종의 군사 전략에 따른 조처였다.

 

세종은 일종의 실미도 부대에 해당하는 특수공작조직도 운용했다. 평안도 지역의 사형수 가운데 지형을 잘 알고 용맹과 기지가 있는 자를 두엇 선발해 압록강 너머로 침투시키고, 낮에는 산속에 잠복하며 밤을 틈타 은밀히 움직여 적의 소굴을 탐지하게 하라는 것이 왕의 지시였다. 이들을 통해 공을 세우게 하고 죄를 속죄하도록 한 조처로, 세종실록 14371017일자 기록에 보인다.

 

세종은 사대주의자가 아니다: 전략으로서의 지성사대

 

그런데도 왜 이영훈 교수는 세종을 사대주의자, 더 나아가 독자적인 군국(軍國)의지도 없이 조선의 군대를 허문 임금으로 규정하려 할까. 이 교수는 세종을 사대주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군주로 보며, 그 근거로 몇 가지 조처를 제시한다. 조선을 명의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태종 때까지 이어지던 하늘제사[天祭]를 폐지한 일, 출정의(出征儀)를 거행하지 않은 점, 그리고 주자가례에 따라 부왕의 국상에 3년 상을 국가 의례로 정립한 점 등을 들고 있다. 나아가 처녀와 해청(海靑)을 정성스레 바쳤다는 기록을 끌어와 황제를 향한 세종의 성심은 끝이 없었다고 비꼬기도 한다(“, 그 완벽한 사대의 예학이여”, 앞의 책, 156~166).

 

명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세종이 온갖 공을 들였다는 이 교수의 지적은, 솔직히 말해 본격적으로 논박할 가치조차 없다. 세종이 그러한 성심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떤 결과를 끌어냈는지 차분히 확인하기만 해도, 세종을 사대주의자로 몰아가려는 그의 주장이 얼마나 비약적이고 터무니없는지 금세 드러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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