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12호] 실록이 밝히는 세종시대 국방의 실체: 오해와 진실2(논쟁)
작성자관리자
본문
나는 세종을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사대전략가’로 본다. 큰 나라의 제도나 문물을 이유 없이 숭배하고 의존하는 태도가 사대주의라면, 세종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그가 실천한 ‘지성사대’는 굴종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외교적 지렛대(Leverage)였다. 세종은 분명한 국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방책으로 지성사대를 활용했는 바, 이는 1432년의 이른바 ‘소 1만 마리 교역’ 사례 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세종대 군사력의 실체: 16만 강군의 나라
그렇다면 조선의 군대는 실제로 어느 정도였을까. 흔히 말하듯 ‘조선에는 실질적 국군이 존재하지 않았고, 왕실을 지키는 소수의 호위 병력만 있었던 것’일까. 조선이 국왕 호위부대를 제외하면 십만 명도 안 되는 군대를 가지고 명나라의 안보우산에 기대어 존속하는 나라였다는 주장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세종시대의 경우 도성의 국왕 호위부대 외에도 압록강 · 두만강 연안 변경에는 3만 명 가량의 막강한 군사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이들 변경 주둔 군대와 전국의 군사, 그리고 도성의 시위군사 2-3만 명을 합치면 현역 군인 16만 여 명이 국방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 근거는 세종실록의 기록에 있다. 1449년(세종 31년) 8월, 명나라에서 영종 황제가 오이라트부 에센에게 사로잡혔다는 위기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즉각 전국 병력 현황을 점검했다. 병조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조선이 동원 가능한 육군 병력은 모두 184,901명에 이르렀다.
구분 |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 | 강원 | 황해 | 평안 | 함경 | 총합 |
현역군 (各色軍) | 11,217 | 20,295 | 35,630 | 43,327 | 6,576 | 14,659 | 21,210 | 5,957 | 158,871 |
예비군 (加定軍) | 2,240 | 4,050 | 7,120 | 8,660 | 1,130 | 2,830 |
|
| 26,030 |
합계 |
| 184,901 |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조선의 현역군은 158,871명이었으며, 여기에 26,030명의 예비군을 추가로 징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보고에 빠져 있는 함경 · 평안 양도의 예비군까지 합친다면 대략 18만에서 20만 가량이 실제로 동원 가능한 병력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육군만이 아니라 해군 역시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종 대의 수군은 모두 50,402명으로, 경기·충청·경상·전라·황해·강원·평안·함길(함경)도 등 전국의 연해 지역에 고르게 배치되었다(차문섭 2003, 207).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 병력을 합친 약 7만 명(통계청 2021. 2 기준)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으로, 조선이 결코 ‘해상 방위에 취약한 국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의 군사력이 왕실 호위 수준에 불과했다는 인식은 사실과 크게 어긋난 통념일 뿐이다. 위의 자료가 보여주듯, 세종 시대의 조선은 육군 약 18만 명, 수군 약 5만 명을 갖춘, 조선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강한 군사적 역량을 확보한 시기였다. 명나라의 안보 우산을 인정하고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한 면이 있었지만, 그 바탕에는 어디까지나 독자적 국방 역량, 곧 강군(強軍)의 토대가 확고히 자리하고 있었다.
힘과 외교의 균형: 전략가 세종의 국익 설계
세종 시대의 국방과 외교는 결코 따로 움직이지 않았다. 강한 국방력이 외교 역량과 결합하면서 조선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더 큰 재량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1432년 ‘소 1만 마리 교역’ 당시 명 황제가 “조선의 탁월한 현왕(賢王)의 판단에 감복했다”고 밝힌 외교문서는, 세종의 정교한 외교 전략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오히려 우리 재량권을 높이고 민생의 부담을 크게 덜어 주었음을 보여준다.
힘이 뒷받침하는 외교 역량에 의해 국익이 극대화되었다는 점은 여러 사례에서 확인된다. 1433년 파저강 토벌 당시 명나라가 조선의 군사 행동을 지지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온 일, 그리고 이후 ‘4군 6진’ 개척 등 북방 영토 확장 과정에서 명이 별다른 외교 분쟁을 제기하지 않은 사실 등이 그 분명한 증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