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세종의 신임은 그보다 앞선 1421년(세종 3)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연려실기술》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을 보면 장영실은 세종이 즉위하고 얼마 안 되어(세종 3년) 천문관인 윤사웅 등과 중국에 파견되어 천문관측시설과 과학기술 문물을 시찰하고 서적을 수집해 돌아왔다. “너희는 중국에 가서 각종 천문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라”라는 세종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관노 출신의 인물을 국가의 핵심 기술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 해외 유학까지 맡긴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듬해인 1422년, 조선으로 돌아온 장영실 등은 세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들은 각종 천문 관련 서적을 들여왔고, 흠경각과 보루각의 제도에 대해서도 폭넓게 연구하였다. 세종은 곧 ‘양각(兩閣) 혼의성상도감(渾儀成象都監)’을 설치해 흠경각과 보루각, 혼천의 등을 제작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
실록을 보면, 1422~1423년경 세종은 장영실을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고[免賤 면천], 궁궐 물품을 맡는 부서인 상의원(尙衣院)에 임명하려 했다. 이를 두고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 등의 의견이 갈렸다.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둘 수 없다”며 반대했고, 조말생은 “장영실 같은 인물이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찬성했다. 조정의 반대가 만만치 않자 세종은 잠시 뜻을 거두었지만, 끝내 영의정 유정현 등과 다시 논의해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임명했다. 소나 말처럼 재산으로 여겨지던 노비 출신 인물을 정5품 관직에 올린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신분보다 능력을 앞세우겠다는 세종의 분명한 선언이었다.
(* 드라마 <대왕 세종> 방영 당시, 제작진이 장영실의 상의원 별좌 임명 시기를 물어온 적이 있다. 나는 “정확한 시점은 분명하지 않지만, 장영실의 관직이 1425년(세종 7) 무렵 사직(司直)이었다는 세종의 회고를 토대로 상의원 별좌 임명은 그 이전이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드라마에서는 세종이 장영실에게 직접 관복을 내려주며 “이것은 상이 아니라 족쇄이자 무기다. 세상의 편견에 굴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기라”고 격려한다. 이어 “책임을 지웠으면 권한 또한 주어야 영이 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록 극적 상상력이 더해졌지만 세종의 인재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다.)
세종이 장영실을 대하는 가장 극적인 장면은 1433년(세종 15) 9월 16일 기사에 나온다.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한 장영실의 공을 논하면서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래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 만대에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 정4품)의 관직을 더해주고자 한다”(세종실록 15년 9월 16일). 특이하게도 이 때에는 별다른 반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데, 이는 면천과 달리 승진은 국왕의 재량에 해당하기 때문인 듯 하다. 여기에 황희 정승의 찬성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황희는 ‘평양의 관노였다가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서 태종에 의해 특별히 호군으로 제수된 김인(金忍)의 전례’를 들어 장영실의 승진에 힘을 실어주었다.
나는 세종의 말 가운데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若非此人 약비차인]”이라는 구절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자격루의 발상이 왕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스스로를 자랑하는 대신 그것을 만들어 내는 장영실의 정교한 솜씨와 헌신을 칭찬하며 감사했다. “만대에 전할 기물”의 공을 자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돌린 것이다. 이에 대한 장영실의 보답도 놀랍다. 옥루(玉漏)라는 임금 전용의 당대 최고의 자동 물시계를 제작해 올린 것이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따르면, 흠경각은 강녕전과 경회루 사이에 설치되었는데, 건물 안에 종이를 뭉쳐 산을 만들고 그 위에 사신(四神)·십이지신·북치는자·종치는자·사신(司辰)·옥녀(玉女) 등을 배치하여, 모든 장치가 사람의 힘 없이 스스로 움직이고 종을 치며 시간을 알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신묘하여 마치 “귀신이 그렇게 하는 듯하였다”고 했다. 한밤중,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저절로 움직이고 소리가 나는 광경을 본 궁중 사람들은 “귀신이 산다”고 두려워할 정도였다.
‘신분질서가 붕괴되면 곧 나라가 망한다’며 강력히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발탁해 준 왕, 그리고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안 되었다”고 공을 인정해 준 임금을 위해, 장영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 물시계 건물을 세운 것이다. 1433년부터 1438년(세종 20) 1월 흠경각이 완성될 때까지 6년 동안, 장영실은 얼마나 신나게 일했을까. 감사와 칭찬이 한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깊이 움직이고, 결국 얼마나 놀라운 성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우리 사회는 해마다 10월이 되면 노벨상 소식으로 떠들썩하다. “왜 우리는 일본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이 반복된다. 그러나 답은 멀리 있지 않을지 모른다. 세종은 재능을 신분보다 앞에 두었고, 인재에게는 파격적인 발탁과 아낌없는 지원을 주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이라고 공개적으로 공을 인정하며,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겨주었다. 그런 풍토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