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그렇게 빼어난 비전을 세종은 어떻게 구현해 나갔을까?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어떻게 설득해냈을까? 《세종실록》으로 볼 때, 훈민정음의 창제 사실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443년 12월 30일이다. 세종 재위 25년째인 그해 연말의 실록 기사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달에(①) 임금이 친히(②) 언문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③).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본떴는데(④)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고, 이를 합한 뒤에야 글자를 이루었다(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는데(⑥), 글자가 비록 간단하고도 요약되면서도 그 전환이 무궁하다(⑦). 이것을 일러 훈민정음이라 하였다(⑧).”(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일련 번호는 필자)
여기서 실록은 훈민정음의 창제자(세종)와 창제 시기(1443년 12월)를 밝힌 뒤, 그 글자가 “간단하면서도 전환이 무궁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6하 원칙’으로 보면, 언제(①), 누가(②), 무엇을(③), 어떻게(④⑤), 왜(=목표 ⑥⑦)를 드러내는데, 훈민정음의 성격과 장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어디서’는 빠져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왜’, 곧 목적에 대한 서술이다. 여기서는 중국 한자와 우리말을 함께 표기할 수 있다는 기능적 측면이 강조될 뿐, 어제 서문에 나오는 “사람마다 쉽게 배워 날마다 편리하게 쓰는 삶”과 같은 가치 지향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창제 기사가 사실의 기록이라면, 어제 서문은 그 사실에 담긴 비전과 철학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에 대한 다음 정보는 이듬해 2월 16일 자 기사에 나온다. “집현전 교리 최항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세자인 문종,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세종실록 26년 2월 16일). 이 기사는 훈민정음 창제와 정착 과정에 관여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집현전 학사로는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가 참여했고, 세자 문종과 수양대군·안평대군, 그리고 왕의 내외척을 관장하는 부서인 돈녕부에서는 강희안이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참여한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20~30대의 소장파였다는 사실이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최항이 35세였고, 박팽년·신숙주·이개, 그리고 강희안은 모두 28세였다. 반면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43세였던 응교 정창손 등 노장파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런데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는 일을 계기로, 집현전 소장 학자들과 세자 및 종친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진행되던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최만리 등 집현전 노장파 신하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불과 나흘 뒤인 1444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은 그 유명한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최만리 등과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끝장토론’을 벌인 뒤에도 세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두 단계를 더 거치며 훈민정음의 체계를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 갔다.
그 하나가 1445년 1월에 있었던 해외 학자 자문이다. “신숙주와 성삼문과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세종실록 27년 1월 7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 당시 요동에는 황찬(黃瓚)이라는 한림학사이자 음운학자가 귀양 가 있었다. 세종은 신숙주와 성삼문을 무려 열세 차례나 압록강 너머로 보내 그를 찾아가게 했고, 훈민정음에 관한 음운학적 자문을 구했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이는 새 문자를 당대 최고 수준의 학문적 검증 위에 세우려 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용비어천가》를 짓게 함으로써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직접 시험해 본 일이다.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로 시작해, “불휘 기픈 남간 바람에 아니 뮐새, 곶 됴코 여름 하니 / 새미 기픈 므른 가뭄에 아니 그츨새, 내히 이러 바다에 가나니”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조선 왕조가 갑자기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준비된 왕조임을 보여준다(세종실록 27년 4월 5일). 동시에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입증한 첫 문헌이기도 했다. 먼저 훈민정음으로 노래를 짓고, 그 뒤에 한자로 그 뜻을 풀이함으로써, 훈민정음이 한자나 이두의 도움 없이도 독립적으로 쓰일 수 있는 우수한 문자 체계임을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