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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29호] 훈민정음과 세종의 비전공감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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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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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훈민정음 서문만큼 빼어난 비전 선언은 없다고 봅니다.”
지난주 한 언론사 기자와 대화하던 중 내가 한 말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한자로 54자로 기록된 세종의 서문(어제서문)이 왜 《세종실록》에는 52자만 남아 있는지, 또 세조 5년(1459)에 간행된 언해본에서 왜 굳이 108자를 맞추려 했는지 등을 이야기하다가 나온 말이다.
(* 해례본의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가 실록에는 人과 易 두 글자를 빼고 ‘欲使人習 便於日用耳’로 기록되어 있다.)

훈민정음 서문, 역사상 가장 빼어난 비전 선언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구성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비전 선언문은 사업 성공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훈민정음 어제 서문은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고, 간명한 해법을 제시하며, 나아가 도달해야 할 목표 상태까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비전선언문이다. 뛰어난 비전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이다.

첫째, 세종은 대다수 백성이 겪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 배 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몯핧 노미 하니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곧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맞지 않아,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 수 없는 현실 고통을 적시한 것이다(문제 정의).

둘째, 효과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내 이랄 위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자랄 맹가노니”라는 선언이다.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스물여덟 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문자를 창제했다는 선언이다. 세종은 복잡한 논변이 아니라 분명한 대안을 가지고 구성원들을 설득하려 했다(해법 제시).

셋째, 세종은 새 문자가 정착된 이후 도달하게 될 목표 상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사람마다 히여 수비 니겨 날로 쓰메 편안픠 하고져 할 따라미니라”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사람마다 쉽게 배워 날마다 편리하게 쓰는 삶, 곧 누구나 문자를 익혀 일상 속에서 자유롭게 뜻을 펼 수 있는 상태를 제시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문자 보급이 아니라, 백성의 삶이 실제로 나아지는 미래, 즉 생생지락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 비전이었다(목표상태).

전체적으로 훈민정음 어제 서문은 복잡한 철학 용어나 추상적 명분이 아니라, 백성이 실제로 겪는 불편과 그 해결이라는 사용자 경험(UX) 중심의 언어로 쓰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 삶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어제 서문을 그냥 명문장이 아니라, 시대를 움직인 최고의 비전 선언문이라 부르는것이다.

창제 이후, 진짜 리더십이 시작되다

그러면 그렇게 빼어난 비전을 세종은 어떻게 구현해 나갔을까?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어떻게 설득해냈을까? 《세종실록》으로 볼 때, 훈민정음의 창제 사실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443년 12월 30일이다. 세종 재위 25년째인 그해 연말의 실록 기사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달에(①) 임금이 친히(②) 언문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③).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본떴는데(④)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고, 이를 합한 뒤에야 글자를 이루었다(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는데(⑥), 글자가 비록 간단하고도 요약되면서도 그 전환이 무궁하다(⑦). 이것을 일러 훈민정음이라 하였다(⑧).”(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일련 번호는 필자)

여기서 실록은 훈민정음의 창제자(세종)와 창제 시기(1443년 12월)를 밝힌 뒤, 그 글자가 “간단하면서도 전환이 무궁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6하 원칙’으로 보면, 언제(①), 누가(②), 무엇을(③), 어떻게(④⑤), 왜(=목표 ⑥⑦)를 드러내는데, 훈민정음의 성격과 장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어디서’는 빠져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왜’, 곧 목적에 대한 서술이다. 여기서는 중국 한자와 우리말을 함께 표기할 수 있다는 기능적 측면이 강조될 뿐, 어제 서문에 나오는 “사람마다 쉽게 배워 날마다 편리하게 쓰는 삶”과 같은 가치 지향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창제 기사가 사실의 기록이라면, 어제 서문은 그 사실에 담긴 비전과 철학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에 대한 다음 정보는 이듬해 2월 16일 자 기사에 나온다. “집현전 교리 최항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세자인 문종,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세종실록 26년 2월 16일). 이 기사는 훈민정음 창제와 정착 과정에 관여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집현전 학사로는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가 참여했고, 세자 문종과 수양대군·안평대군, 그리고 왕의 내외척을 관장하는 부서인 돈녕부에서는 강희안이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참여한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20~30대의 소장파였다는 사실이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최항이 35세였고, 박팽년·신숙주·이개, 그리고 강희안은 모두 28세였다. 반면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43세였던 응교 정창손 등 노장파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런데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는 일을 계기로, 집현전 소장 학자들과 세자 및 종친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진행되던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최만리 등 집현전 노장파 신하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불과 나흘 뒤인 1444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은 그 유명한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최만리 등과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끝장토론’을 벌인 뒤에도 세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두 단계를 더 거치며 훈민정음의 체계를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 갔다.

그 하나가 1445년 1월에 있었던 해외 학자 자문이다. “신숙주와 성삼문과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세종실록 27년 1월 7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 당시 요동에는 황찬(黃瓚)이라는 한림학사이자 음운학자가 귀양 가 있었다. 세종은 신숙주와 성삼문을 무려 열세 차례나 압록강 너머로 보내 그를 찾아가게 했고, 훈민정음에 관한 음운학적 자문을 구했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이는 새 문자를 당대 최고 수준의 학문적 검증 위에 세우려 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용비어천가》를 짓게 함으로써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직접 시험해 본 일이다.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로 시작해, “불휘 기픈 남간 바람에 아니 뮐새, 곶 됴코 여름 하니 / 새미 기픈 므른 가뭄에 아니 그츨새, 내히 이러 바다에 가나니”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조선 왕조가 갑자기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준비된 왕조임을 보여준다(세종실록 27년 4월 5일). 동시에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입증한 첫 문헌이기도 했다. 먼저 훈민정음으로 노래를 짓고, 그 뒤에 한자로 그 뜻을 풀이함으로써, 훈민정음이 한자나 이두의 도움 없이도 독립적으로 쓰일 수 있는 우수한 문자 체계임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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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창제–논쟁–자문–실험의 단계를 거쳐 정음은 마침내 1446년 9월 29일 공식 반포에 이르렀다. 세종 재위 28년 9월 29일 기사에는 두 개의 중요한 문건이 함께 올라 있다. 하나는 앞에서 살핀 세종이 직접 지은 서문, 곧 어제(御製) 서문이고, 다른 하나는 정인지의 서문이다. 세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해 10월에는 관리들의 죄를 훈민정음으로 기록해 의금부와 승정원에 검토하게 했고(세종실록 28년 10월 10일), 12월에는 문서 담당 하급 관리의 선발시험에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보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훈민정음을 실제 행정의 도구로 정착시키려는 조치였다.

스스로 깨우치는 문자, 훈민정음

더 나아가 다음 해인 1447년에는 최초의 언문 산문책인 《석보상절》을 간행하게 했고, 세종 자신이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훈민정음이 궁궐 안의 실험에 머무르지 않고, 행정과 교육, 그리고 백성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 일부 연구자들은 한글 창제 이후 백성 교육을 위한 별도의 제도나 방침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제 서문의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를 “서리(書吏)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사용하는 데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로 해석하기도 한다(서민정 2011, 이현욱 2025). 그러나 이는 훈민정음의 학습 방식을 간과한 억지 해석에 가깝다.)

훈민정음은 한문처럼 서당이나 향교에서 오랜 시간 교육을 받아야 하는 문자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글자가 간단하면서도 전환이 무궁하여 사람마다 쉽게 깨칠 수 있는 문자”로 설계되었다. 정인지가 “그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이 지나기 전에, 슬기롭지 못한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한 것도 바로 그 점을 말한다.

실제로 조선 후기 불교 승려들은 민간에서 낱장으로 팔리던 음절표, 곧 언문 반절을 벽에 붙여 놓고 한글을 스스로 익혔고, 「현풍곽씨언간」에서 보듯이 양반가에서도 부녀자들이 어린아이의 한글 교육을 맡았다. 이는 훈민정음이 특정 계층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백성 스스로 깨우치는 문자 체계였음을 보여준다(백두현, 《조선시대의 한글 교육과 확산》, 2023).

세종 말년에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해 여러 불경이 언해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백성들이 스스로 익힌 훈민정음으로 경전을 읽고 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1459년에 해례본의 한문 서문을 우리말로 풀이하면서 불교적으로 친숙한 숫자인 ‘108’에 맞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훈민정음은 가르쳐 주는 문자이기 이전에,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문자였다.

글자를 넘어, 말할 수 있는 나라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백성들이 훈민정음을 최초로 사용한 사례가 정승을 비판하는 투서였다는 점이다. 1449년 10월, 어느 백성이 당시 일을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던” 정승 하연에 대해 벽에 “하 정승아, 또 공사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써 붙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세종실록 31년 10월 5일). 이는 훈민정음이 이미 궁궐과 관청을 넘어 백성의 현실 속으로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왕이 만든 새 문자가 백성의 입이 되어 권력자를 비판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문자란 결국 말할 수 없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주는 장치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훈민정음의 정신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1443년 12월) 이후 반포(1446년 9월)까지, 새로운 문자 체계의 우수성을 알리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실제로 활용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결과 반포한 지 채 3년도 되지 않은 시점(1449년 10월)에 일반 백성이 한글로 자신의 의견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세종의 뛰어남은 위대한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분명한 비전으로 제시하고, 끝내 현실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는 점이다. 세종은 왕의 권위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왜 필요한지 설명하고, 그 정당성을 논증하며, 실제로 써보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늘날 많은 조직이 혁신에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전은 제시하지만 공감을 만들지 못하고, 제도는 만들지만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 세종은 달랐다. 그는 먼저 백성을 불편하게 하는 구조를 보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언어를 만들었으며, 끝까지 그것이 삶 속에 자리 잡도록 책임졌다.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 창제의 역사가 아니라, 세종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시대를 바꾸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빛나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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